'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우리는 거대한 괴물의 모습을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우리가 이야기하는 괴물을 만든 사람의 이름이지, 실제론 괴물의 이름은 없다. 그저 괴물이라고 불릴 뿐이다.
그(괴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싶지 않아서 다음처럼 표기하려한다.)는 세상에 손 잡을 사람 하나 없이 시작한다. 자신을 창조한 아버지라는 사람은 자신의 모습을 보고 도망을 갔으며, 타인의 행복을 위해 뻗은 손을 본 다른 이들은 기겁을 하고 배척하기 급급하다. 그는 자신의 창조주인 빅터에게 자신과 같이 어울릴 신부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나, 결국 이는 성사되지 않는다. 빅터를 미워했지만, 사랑했으며 결국 그가 죽었을 때 가장 슬퍼한 사람이다.
본인을 이해하고, 인간을 이해할수록 그는 사랑을 갈구한다. 여기서 사랑은 이성간의 사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신부를 요구했지만, 이는 자신과 함께 해줄 또 다른 인격체가 필요했던 것이다. 자신을 사랑해주고, 자신이 사랑해줄 수 있는 내가 아닌 또 다른 누군가.
빅터가 그를 사랑으로 안아줬으면, 혹은 그토록 혐오하지 않았다면 그에게도 이름이 생기지 않았을까?
사람은 태어날 때 선한가 악한가에 대한 관점으로 바라보았을 때,
그는 원래 순수했는데 사랑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빅터에게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빼앗아갔을까,
아니면 그는 원래 악한 존재였는데, 펠릭스의 가족에게서 들은 책을 통해서 선한 마음을 가지고 사랑을 주고 받고 싶어했을까?
무에 가까운 존재에게 선하다, 악하다의 우리가 매겨 놓은 기준으로 평가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어린 아이들이 부모의 사랑을 받기 위해 갓 태어난 아이들에게, 어른의 시선에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행동을 하는 것을 선과 악으로 구분해서 볼 수 있을까.
공공 장소에서 아이들이 하는 행동에 대부분의 어른들은 그들의 부모를 이야기한다. 아이가 아닌 어른에게 책임을 무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럼 빅터에게는 아버지로서, 창조주로서의 모습은 어땠을까? 혹은 펠릭스와 가족들이 그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면, 그를 하나의 인격체를 인정해주고 그에게 안정과 사랑을 하는 법을 알려주었다면 어땠을까? 혹은 그가 본인의 모습을 인정하고 난 뒤, 사람들과 거리를 유지하며 본인을 서서히 드러내었다면 어땠을까?
나도 누군가에게 괴물이었겠지. 내 자신에게 괴물일 가능성 또한 높다.
사람은 서로에게 의지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생명체인데, 나는 타인과 잘 섞이고 있는가.
혼자 있으면 누군가와 함께 하고 싶으면서, 누군가와 함께하면 혼자있고 싶다.
인간관계가 너무 지겨워 가장 어두운 동굴 속으로 향하고 싶다가도, 아름답게 빛나는 순간에는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그 곳으로 향하고 있다.
책임의 가중치를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다.
그저 더 좋은 방향을 바라보고 살아갈 수는 없는 걸까.
창조주여, 저를 흙으로 빚어 인간으로 만들어라고 제가 요청했습니까?
어둠에서 끌어내 달라고 제가 애원이라도 했습니까?
- 실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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